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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善行)/윤덕호 감독 영상제작 40 년(7)

가짜 유공자를 배출해 온 국가 보훈처

가짜 유공자를 배출해 온 국가 보훈처

http://blog.daum.net/56dhyoon/15846428

윤덕호 감독 님께서
' 동두천시 명예가 걸린 독립투사 홍병준(덕문) 선생
서훈을 정부에서 인정하게 하는 일 ' 이라고 하시면서
과거의 그 오욕의 역사를 재조명하시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시니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께서 깊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홍덕문선생은 무슨 일을 하신 분이신가 ?

선생은 1919년 음력 2월 25일 동두천 장날 정오에 1000여명의

군중을 인솔하고, 선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당하였다.그러나 감옥에서도

만세를 연창하며 백절불굴의 의지를 보였으나,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후 결국 고문과 형독(形毒)으로 1923년 5월 17일 걸산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이런 선생의 얼을 되살리기 위해 1975년

동두천 노인회가 독립유공자추모회를 결성해 시민의 성금을

모아 추모비를 세웠고,1991년에는 동두천 애향동지회 주관으로

비각이 건립되었다. 현재 비각은 동두천 소요산 입구에 서있다.

소요산 입구에 위치한 홍덕문 비각

동두천시는 홈페이지에 홍덕문 선생의 업적을 게재해 놓고 있으며,

추모비각은 1986년 4월 28일 동두천시문화재로 지정됐다. 동두천

시가 1999년 펴낸 ‘동두천시 역사와 문화유적’을 보면 ‘1919년

3·1운동 때 홍덕문 선생 등이 1000여 군중을 인솔하여 동두천

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동두천시청 홈페이지 보기

http://ddc21.net/ddc/cms/contents.asp?conNum=515


홍덕문 선생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동두천시와 사회단체들의 협력이
절실한 상황이다. 연천군에 거주하는 이희빈 씨는 홍덕문 선생과 대고모부(고모할아버지) 관계로,
홍덕문 선생의 독립유공자 추서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매번 자료부족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희빈 씨는 “보훈처가 요구하는 증거를 찾으려면 국가기관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국가보훈처가 요구하는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는데 따르는 어려움을 호소해 왔다.

홍덕문선생의 마지막 후손 한분 인 이희빈씨가 정부기관에 수차례 민원을 제기 한 것 중
한가지 만 소개 하겠다. 2007년6월28일에 보낸 민원이 2008년10월1일 16개월만에 보낸
국가보훈처장관의 답변은 독립유공자 서훈공적심사위원에서 포상보류 하였음.
동두천시사.추모비.인우보증서 등, 1945년 광복이후의 증빙자료는 필요하지 않아 홍덕문선생은
인정 할 수 없다. 3.1운동만세 주동자로 이담면(현 동두천시)헌병대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의
刑毒으로 서거.동두천 어른들이 홍덕문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성금을 모으고 동두천시장님의
협조로 세워진 홍덕문비는 인정하지않는다. 기가 막힌 답변이다
.

필자가 홍병준선생의 서훈문제로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왕산허위선생이 서대문형무소 5개월 수감 생활과
1908년10월21일 사형당한 기록이 있느냐 ? 물어 보았다.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에서는
역사학자들이 발굴한 문헌에 의해 서훈을 하였다고 한다.독립투사분들이 당한 고문.체포.
수감.의문사,사형 등의기록은 1945년 일제가 물러 가면서 형무소기록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찾아 낼 수가 없다.더군다나 홍병준선생은 이당면 헌병대에서 고문을 당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구한말 금부도사를 지낸 홍병준선생은 이당면(현동두천)의 어른들로
이어져 온 자랑스로운 역사로서 82.000명의 시민과 동두천市長님의 명예를 국가보훈처
장관의 무지하고 안일한 태도로 역사 속으로 묻혀져 버릴 것 이다.

가짜 유공자 배출해온 국가보훈처

감사원에 따르면 국가보훈처 등 5개 기관 소속 공상공무원 3074명 가운데 993명이 부적격

국가유공자로 드러났다. 무면허로 운전하다 부상한 경우, 만취 상태의 부하 직원이 운전하던

승용차를 타고 가다 다친 경우, 족구하다 무릎 부상을 입은 경우도 국가유공자나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지원대상자로 인정됐다고 한다. 일부는 공무원연금관리공단으로부터 본인의 과실이

크다는 통보가 있었으나 국가유공자로 버젓이 등록됐다. 부적격 국가유공자들은 법에 따라

각종 혜택을 받았다..

윤감독이 무슨 일을 하는 가 보기

왕산허위선생 후손 "100년만의 귀향"에 의한 사연

구한말 국무총리.대법원장을 지낸 왕산허위선생 (13道 의병대장)
일제 총독부를 없애기 위해 서울 탈환작전 중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908년10월21일 순국.(교수형) 후.후손들은
일경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로 망명하여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을
3년간 추적하여 찾아내어 "찾아가는 써비스 발굴하는 보훈행정"의
슬로건을 건 국가보훈처에 알렸지만.보훈처장관의 답변은 "사안은

좋으나 국가예산이 없어서 추후에 반영토록 하겠다"

왕산허위선생

허위선생 후손 귀국에 추후 반영도록 하겠다던 국가보훈처

후손 23명을 귀국시키고. 2명이 한국국적을 받는 날. 법무부에
나타난 국가보훈처직원. 8.15 광복절에는 왕산허위선생 후손을
故 노대통령께 알현시키고.3.1절 홍보성으로 국가보훈처장관이
후손들이 사는 월세 지하방에 찾아가 쌀20kg을 전달하였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1년 동안 교육을 시켜 직업을 알선한다는
국가보훈처.유공자후손들의 평균나이가 80세. 그나마 왕산허위
지하방에 찾아온 박유철장관 선생 후손들이 62세로 가장 어리지만.보훈처는 35세에 해당되지

 않아 지원 해줄 수 없다는 답변.월세방도 구할 수 없는 정착금
4천만원을 지급. 6개월동안 일당 노동자.날품팔이로 생활이

어렵게되자. 키르키즈스탄으로 쓸쓸히 돌아 갔다.
(유공자를 찾아 내는 일은 국가보훈처에서 귀찮아 하는 것을

허위후손들을 귀국시키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MBC광복60주년 특집 "100년만에 귀향" MBC 9시 특집뉴스

광복61주년 특집 "한국인의 조건"암니옴니.생방송 좋은아침등

EBS 왕산家의 사람들 1.2부 SBS 추적60분.뉴스추적.

KBS 특집 "고려인 아리랑"등 다수 방영 하였음

 

귀국시킨 왕산허위선생 후손들

국가보훈처 직원들과 수많은 통화를 하였지만, 동문서답,
거짖말 자꾸하면 국가보훈처장관을 개패듯 패버리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왕산허위선생의 장손녀 허로사씨를 우즈베키스탄에서 찾아낸 것을 알게 된
前 한명숙국무총리께서 한국으로 초청하여 체류중에 인색하였던 국가보훈
처장관이 허로사씨를 특별히 만났으며.허위선생 형님 허겸(애국장) 중국에
사는 후손15명을 찾아낸 것도 국가보훈처는 귀찮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내가 바라는 대한민국 일까?

허위 후손들 문제로.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 국가 보훈처 슬로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