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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소식(가나다라 순)/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Re:[판결문]후지코시 근로정신대 2,3차 항소심 소송 판결문(1/30, 1/23) A

서  울  고  등  법  원


제 7 민 사 부


판   결



사 건             2016나2084567 손해배상
원고, 피항소인    1. 김옥순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9가길 9 (돈의동)
2. 박순덕
화성시 비봉면 푸른들판로1123번길 8-12
3. 오경애
광주 서구 양동 402-1
4. 이석우
서울 도봉구 마들로 684-20 (도봉동)
5. 최태영
의정부시 효자로 26, 603동 902호 (민락동)
원고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해마루
담당변호사 김세은
피고, 항소인      주식회사 후지코시 (不二越)
일본국 도야마시 후지코시 혼마치 1정목 1번 1호
(日本國 富山市 不二越 本町 1丁目 1番 1号)
대표취체역(代表取締役) 혼마 히로오(本間 博夫)
소송대리인 변호사 허영범
제 1 심 판 결     서울중앙지방법원 2016. 11. 23. 선고 2015가합9863 판결
변 론 종 결       2019. 1. 11.
판 결 선 고       2019. 1. 30.



주   문
1. 피고의 항소를 모두 기각한다.
2. 항소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청구취지 및 항소취지
1. 청구취지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100,000,000원 및 이에 대하여 이 사건 소장 부본 송달일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2. 항소취지
제1심 판결 중 피고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그 취소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다.

이 유
1. 인정 사실
가. 일본의 한반도 침탈과 강제동원 등
1) 일본은 1910. 8. 22. 한일합병조약 이후 조선총독부를 통하여 한반도를 지배하였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전시체제에 들어가게 되었고,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까지 일으켰다.
2) 일본은 이러한 전쟁으로 인력과 물자가 부족해지자, 1938. 4. 1. ‘국가총동원 법’을, 1939. 7. 8. ‘국민징용령’을 제정․공포하고, 1942년에는 ‘조선인 노무자 활용에 관한 방책’과 ‘조선인 내지이입 알선 요강’을 제정하여 한반도에서 관(官) 알선 형식의 노무동원계획을 실시하였다. 일본은 1944. 8. 8. 각의(閣議)에서 ‘반도인 노무자 이입에 관한 건’을 결의함으로써 특수기능의 보유 여부와 관계없이 일반 한국인을 대상으로 징용을 실시하였다.
3) 또한 일본은 1943. 9. 13. 차관회의에서 ‘여자근로동원 촉진에 관한 건’을 결의하고, 1944. 3. 18. 각의에서 ‘여자정신대제도 강화방책요강’을 결의하여, 국민등록자 인 여자를 여자정신대로 조직해서 필요한 업무에 협력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 가능 하게 하였고, 같은 해 6. 21. 각의에서 ‘여자정신대원 인수측 조치 요강’ 을 결의하고, 같은 해8. 23.에는 ‘여자정신근로령’을 공포하여 이를 한반도에서도 동시에 시행 하였다.
위 ‘여자정신대제도 강화방책요강’ 및 ‘여자정신근로령’에서는 “특히 지원하는 자는
정신대원으로 할 것을 막지 않음”이라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지원이라는 형식으로 근로정신대원 모집이 행해졌다. 이러한 모집은 관의 적극적인 개입이나 신문광고, 기사를 통한 모집, 학교나 단체를 통한 모집의 방법으로 이루어 졌는데, 특히 국민학교의 담임교사나 학교장이 재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지원을 강요하거나 가정방문을 하여 설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집된 근로정신대원들은 피고를 비롯한 미쓰비시중공업 주식 회사,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도토구 공장, 도쿄 아사이토 방적 주식회사 누마즈 공장 등의 군수 공장에 동원되었다.
4) 태평양전쟁은 1945. 8. 6.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다음, 같은 달 15일 일본 국왕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끝이 났다.
나. 원고들의 동원과 강제노동 피해 및 귀국 경위
1) 당사자의 지위
원고들은 1929년경부터 1932년경까지 사이에 한반도에서 태어나 군산, 목포, 광주,서울, 대구 등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이다.
피고는 1928년경 일본국 도야마시에서 설립되어 금속 열처리, 공업용 재료 생산 및 가공업 등을 운영하던 회사이다(당시 회사명은 ‘후지코시 강재공업주식회사’였다). 피고는 1944. 1. 18.경 일본의 군수회사법 제2조 제1항에 근거하여 군수회사로 지정되었고,1944년경부터 1945년경까지 군수품인 축받이, 특수강 등을 생산하였다.
2) 원고별 근로정신대 동원 과정
가) 원고 김옥순은 1929. 7. 24. 군산시에서 출생하였고, 金田春子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원고 김옥순은 군산소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위 학교의 선생님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원고 김옥순은 위 소학교 6학년에 재학 중(당시 만 15세) 담임교사로부터 ‘같은 반 60여 명의 여학생 중에서 50명이 일본에 동원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듣고 근로정신대에 동원될 사람을 정하기 위한 제비뽑기를 하였는데, 이에 선정되어 근로정신대원으로 차출되었다. 당시 나이가 어렸던 원고 김옥순은 제비뽑기로 정해지면 일본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1945년 2월경 다른 근로정신대원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간 뒤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도야마까지 이동하여 피고의 도야마 공장(이하 ‘이 사건 공장’이라 한다)으로 갔다.
나) 원고 박순덕은 1932. 6. 28. 목포시에서 출생하였고, 新井淸子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원고 박순덕은 1944년 11월경 목포 산정국민학교 6학년에 재학 중(당시 만 12세) 모범생이라는 이유로 근로정신대원으로 차출되었다. 원고 박순덕의 부모는 근로정신대 선정에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학교에서 내린 결정을 바꾸지 못하였고, 원고 박순덕은 다른 근로정신대원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간 뒤 배를 타고 일본으로 이동하여 이 사건 공장으로 갔다.
다) 원고 오경애는 1930. 1. 30. 광주에서 출생하였고, 􈩀原景愛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원고 오경애는 1944. 3. 15. 극락국민학교를 졸업하였는데, 그해 가을부터 마을에서 학교 교사, 교장, 면장 등이 국민학교를 졸업한 6명의 여학생들을 근로정신대로 차출하려 하자 이를 피해서 숨어 있다가 1944년 10월경(당시 만 14세) 발각되어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다. 원고 오경애는 다른 근로정신대원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간 뒤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도야마까지 이동하여 이 사건 공장으로 갔다. 당시 원고 오경애는 ‘일본에 가면 상급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더 할 수 있고 기술도 배울 수 있다.’는 말로 회유를 당했다.
라) 원고 이석우는 1930. 9. 2.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月川錫雨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원고 이석우가 1944년경 장춘국민학교 고등과 2학년에 재학하던 중(당시 만 13세), 원고 이석우의 담임교사는 ‘피고 공장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고 대가를 받고 일할 수 있다.’는 식으로 회유를 하면서 근로정신대의 지원자를 모집하였으나 지원자 수가 모집인원에 미달하자, 원고 이석우가 ‘내가 한번 가볼까’ 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근로정신대원으로 차출하였다. 원고 이석우는 1944. 7. 2.경 다른 근로정신대원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간 뒤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끼로 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도야마까지 이동하여 이 사건 공장으로 갔다.
마) 원고 최태영은 1929. 11. 16. 대구에서 출생하였고, 高山泰英으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원고 최태영은 1944년경 희도국민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당시 만 15세), 담임교사로부터 ‘일본에 가면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부모 몰래 근로정신대 에 지원하였다. 원고 최태영은 그 무렵 다른 근로정신대원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간 뒤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끼로 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도야마까지 이동 하여 이 사건공장으로 갔다.
3) 원고들의 근로 및 생활 환경 등
원고 김옥순은 이 사건 공장에서 총알, 비행기, 폭탄 등을 만드는 작업에, 원고 박순덕은 이 사건 공장에서 불량 비행기 부품을 분류하는 작업에, 원고 오경애는 이 사건 공장에서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작업에, 원고 이석우는 이 사건 공장에서 비행기 부속품을 만들기 위하여 철을 깎는 작업에, 원고 최태영은 이 사건 공장에서 드릴을 만드는 작업에 각 종사하는 등 원고들이 담당한 일은 대체로 비행기 부품 또는 폭탄을 만들고 철을 깎거나 자르는 위험한 작업이었다. 원고들은 대부분 이 사건 공장 내 각 작업장에 배치되어 각자의 작업장에서 매일 10~12시간가량 위와 같은 노동을 하여야 했다.
원고들은 하루 작업을 마치면 피고가 마련한 기숙사로 돌아가 숙식을 해결하였다.
원고들은 좁은 기숙사 방에서 여러 명이 함께 생활하였는데, 기숙사에는 난방시설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침구도 부족하거나 부실하여 겨울에는 추위에 시달리고 동상에 걸리기도 했다. 또한 이 사건 공장에는 식당과 매점이 있었으나, 1945년경에는 물자가 부족해 식량 사정도 나빠졌으며, 종전이 가까워지자 이 사건 공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식사로 삼각빵이 배급되고 그중에는 공복을 물로 견디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1944년과 1945년경부터 이 사건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원고들로서는 이 사건 공장에서 일하는 기간 내내 배고픔을 감내해야만 했다. 1945년경부터는 도야마에 대한 공습이 심해져한밤중에 대피하는 일도 있어 원고들은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다. 기숙사 주위에는 철조망이 처져 있었고, 입구에는 감시원이 있었으며, 자유로운 외출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한반도에 남아 있는 가족들과 서신을 교환하는 경우 그 내용은 피고의 직원들에 의하여 검열되었다. 원고들은 이 사건 공장에서 근로를 제공하였음에도 임금을 지급받지 못하였고, 원고들 중 근로정신대원으로 지원하였던 사람들은 근로정신대 지원 당시 들었던 이야기와 달리 학교 교육 등을 받지도 못하였다.
4) 귀국 경위
원고 김옥순은 이 사건 공장에서 작업에 종사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고, 1945년10월경에 귀국하였다. 원고 박순덕은 이 사건 공장에서 작업에 종사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고, 1945년 11월경에 귀국하였다. 원고 오경애는 이 사건 공장에서 작업에 종사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고, 1945년 10월경에 귀국하였다. 원고 이석우는 이 사건 공장에서 작업에 종사하던 중 1945년 7월경 피고가 당시 한반도 황해도 사리원에 새로 지은 공장에서 일할 직원으로 선발되어 황해도 사리원으로 갔다가 피고의 사정으로 일시적으로 귀가하라는 명령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원고 이석우는 피고의 소집 명령을 두려워하며 기다리던 중 1945. 8. 15. 해방을 맞이하였다. 원고 최태영은 이 사건 공장에서 작업에 종사하다가 해방되기 직전에 한반도로 귀국하였다.
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등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미 군정 당국은 1945. 12. 6. 공포한 군정법령 제33호로 재한국 일본재산을 그 국유․사유를 막론하고 미군정청에 귀속시켰고, 이러한 구 일본재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 9. 20.에 발효한 􎛱대한민국 정부 및 미국 정부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의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되었다.
미국 등을 포함한 연합국 48개국과 일본은 1951. 9. 8. 전후 배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평화조약(이하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라 한다)을 체결하였고,위 조약은 1952. 4. 28. 발효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a)는 일본의 통치로부터 이탈된 지역의 시정 당국 및 그 국민과 일본 및 그 국민 간의 재산상 채권․채무 관계는 위 당국과 일본 간의 특별약정으로써 처리한다는 내용을, 제4조(b)는 일본은 위 지역에서 미 군정 당국이 일본 및 그 국민의 재산을 처분한 것을 유효하다고 인정한다는
내용을 정하였다.
라. 청구권협정 체결 경위와 내용 등
1)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1951년 말경부터 국교정상화와 전후 보상문제를 논의하였다. 1952. 2. 15. 제1차 한일회담 본회의가 열려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대한민국은 제1차 한일회담 당시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협정 요강 8개항’(이하 ‘8개 항목’이라 한다)을 제시하였다. 8개 항목 중 제5항은 ‘한국법인 또는 한국 자연인의 일본은행권,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이다. 그 후 7차례의 본회의와 이를 위한 수십 차례의 예비회담, 정치회담 및 각 분과위원회별 회의 등을 거쳐 1965. 6. 22.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그 부속협정인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조약 제172호, 이하 ‘청구권협정’이라 한다) 등이 체결되었다.
2) 청구권협정은 전문(前文)에서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양국 간의 경제협력을 증진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라고 정하였다. 제1조에서 ‘일본국이 대한민국에 10년간에 걸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억 달러의 차관을 행하기로 한다’고 정하였고, 이어서 제2조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시 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2. 본조의 규정은 다음의 것(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각기 체약국이 취한 특별조치의 대상이 된 것을 제외한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 일방 체약국의 국민으로서 1947년 8월 15일부터 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사이에 타방 체약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사람의 재산, 권리 및 이익
⒝ 일방 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있어서의 통상의 접촉의 과정에 있어 취득되었고 또는 타방 체약국의 관할 하에 들어오게 된 것
3.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 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 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 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 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3) 청구권협정과 같은 날 체결되어 1965. 12. 18. 발효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조약 제173호)은 청구권협정 제2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 “재산, 권리 및 이익”이라 함은 법률상의 근거에 의거하여 재산적 가치가 인정되는 모든 종류의 실체적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양해되었다.
⒠ 동조 3.에 의하여 취하여질 조치는 동조 1.에서 말하는 양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취하여질 각국의 국내조치를 말하는 것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 동조 1.에서 말하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되는 양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에는 한일회담에서 한국 측으로부터 제출된 “한국의 대일청구요강”(소위 8개 항목)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청구가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동 대일청구요강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게 됨을 확인하였다.

마. 청구권협정 체결에 따른 양국의 조치
1) 청구권협정은 1965. 8. 14. 대한민국 국회에서 비준 동의되고 1965. 11. 12. 일본 중의원 및 1965. 12. 11. 일본 참의원에서 비준 동의된 후 그 무렵 양국에서 공포되었고, 양국이 1965. 12. 18.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발효되었다.
2) 대한민국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지급되는 자금을 사용하기 위한 기본적 사항을 정하기 위하여 1966. 2. 19.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고,이어서 보상대상이 되는 대일 민간청구권의 정확한 증거와 자료를 수집함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기 위하여, 1971. 1. 19.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이하 ‘청구권신고법’이라 한다)을 제정하였다. 그런데 청구권신고법에서 강제동원 관련 피해자의 청구권에 관하여는 ‘일본국에 의하여 군인․군속 또는 노무자로 소집 또는 징용되어 1945. 8. 15. 이전에 사망한 자’만을 신고대상으로 한정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청구권 신고법에 따라 국민들로부터 대일청구권 신고를 받은 후 실제 보상을 집행하기 위하여 1974. 12. 21.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이하 ‘청구권보상법’이라 한다)을 제정하여 1977. 6. 30.까지 총 83,519건에 대하여 총 91억 8,769만 3,000원의 보상금(무상 제공된 청구권자금 3억 달러의 약 9.7%에 해당한다)을 지급하였는데, 그중 피징용사망자에 대한 청구권 보상금으로 총 8,552건에 대하여 1인당 30만 원씩 총 25억6,560만 원을 지급하였다.
3) 일본은 1965. 12. 18.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일본국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 제2조의 실시에 따른 대한민국 등의 재산권에 대한 조치에 관한 법률􎛲(이하 ‘재산권조치법’이라 한다)을 제정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대한민국 또는 그 국민의 일본 또는 그 국민에 대한 채권 또는 담보권으로서 청구권협정 제2조의 재산, 이익에 해당하는 것을 청구권협정일인 1965. 6. 22. 소멸하게 한다는 것이다.
바. 대한민국의 추가 조치
1) 대한민국은 2004. 3. 5.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진상규명법’이라 한다)을 제정하였다. 위 법률과 그 시행령에 따라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되어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조사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
2) 대한민국은 2005년 1월경 청구권협정과 관련한 일부 문서를 공개하였다. 그 후구성된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이하 ‘민관공동 위원회’라 한다)에서는 2005. 8. 26.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와 군대 등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으며, 사할린 동포 문제와 원폭 피해자 문제도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공식의견을 표명하였는데, 위 공식의 견에는 아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한일협상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의 법적 배상􎇍보상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 사실”에 근거하여 정치적 보상을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 간 무상자금산정에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함
○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불은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 총독부의 대일채권 등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임
○ 청구권협정은 청구권 각 항목별 금액 결정이 아니라 정치협상을 통해 총액 결정방식으로 타결되었기 때문에 각 항목별 수령금액을 추정하기 곤란하지만, 정부는 수령한 무상 자금 중 상당 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됨
○ 그러나 75년 우리 정부의 보상 당시 강제동원 부상자를 보호 대상에서제외하는 등 도 의적 차원에서 볼 때 피해자 보상이 불충분하였다고 볼 측면이 있음

3) 대한민국은 2006. 3. 9. 청구권보상법에 근거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불충분함을 인정하고 추가보상 방침을 밝힌 후, 2007. 12. 10.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2007년 희생자지원법’이라 한다)을 제정하였다. 위 법률과 그 시행령은, ① 1938. 4. 1.부터 1945. 8. 15. 사이에 일제에 의하여 군인․군무원․노무자 등으로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그 기간 중 또는 국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강제동원희생자’의 경우 1인당 2,000만 원의 위로금을 유족에게 지급하고, ②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부상으로 장해를 입은 ‘강제동원희생자’의 경우 1인당 2,000만 원 이하의 범위 안에서 장해의 정도를 고려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금액을 위로금으로 지급하며, ③ 강제동원희생자 중 생존자 또는 위 기간중 국외로 강제동원되었다가 국내로 돌아온 사람 중 강제동원희생자에 해당하지 못한 ‘강제동원생환자’ 중 생존자가 치료나 보조 장구 사용이 필요한 경우에 그 비용의 일부로서 연간 의료지원금 80만 원을 지급하고, ④ 위 기간 중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노무제공 등을 한 대가로 일본국 또는 일본기업 등으로부터 지급받을 수 있었던 급료 등을 지급받지 못한 ’미수금피해자‘ 또는 그 유족에게 미수금피해자가 지급받을 수 있었던 미수금을 당시 일본 통화 1엔에 대하여 대한민국 통화 2,000원으로 환산하여 미수금지원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4) 한편 진상규명법과 2007년 희생자지원법이 폐지되는 대신 2010. 3. 22.부터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2010년 희생자지원법’이라 한다)은 사할린지역 강제동원피해자 등을 보상대상에 추가하여 규정하고 있다.
사. 원고들의 피해 사실 인정 등
원고 이석우는 2006. 4. 11., 원고 오경애는 2006. 6. 5., 원고 최태영은 2006. 11. 17., 원고 박순덕은 2007. 1. 15. 각 진상규명법에 의하여 피해 사실이 인정되는 자로 결정되었고, 원고 김옥순은 2012. 10. 24. 2010년 희생자지원법에 의하여 국외 강제동원 생환자 및 의료지원금 지원대상자로 결정되었다.
[인정 근거] 다툼 없는 사실, 갑 제1 내지 12, 14 내지 16, 18 내지 31, 38 내지 44호증, 을 제5, 6호증(가지번호 있는 것은 가지번호 포함, 이하 같다)의 각 기재, 제1심의 원고 김옥순에 대한 당사자본인신문 결과, 변론 전체의 취지
2. 본안전 항변에 관한 판단
가. 피고 주장의 요지
피고는 일본 법인이고 이 사안과 대한민국 사이에는 실질적 관련성이 없으므로 대한민국 법원의 국제재판관할권이 인정되지 아니한다. 따라서 이 사건 소는 국제재판관할권이 없는 대한민국 법원에 제기된 것으로서 부적법하다.
나. 판단
국제재판관할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당사자 간의 공평, 재판의 적정, 신속 및 경제를 기한다는 기본이념에 따라야 할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소송당사자들의 공평, 편의 그리고 예측가능성과 같은 개인적인 이익뿐만 아니라 재판의 적정, 신속, 효율 및 판결의 실효성 등과 같은 법원 내지 국가의 이익도 함께 고려하여야 할 것이며, 이러한 다양한 이익 중 어떠한 이익을 보호할 필요가 있을지 여부는 개별 사건에서 법정지와 당사자와의 실질적 관련성 및 법정지와 분쟁이 된 사안과의 실질적 관련성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삼아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할 것이고(대법원 2005. 1. 27. 선고 2002다59788판결 등 참조), 국제재판관할에 관하여 조약이나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상의 원칙이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고 이에 관한 우리나라의 성문법규도 없는 이상 우리나라 민사소송법의 토지관할에 관한 규정 또한 위 기본이념에 따라 제정된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위 규정에 의한 재판적이 국내에 있을 때에는 섭외적 사건에 관한 소송에 관하여도 우리나라에 재판관할권이 있다고 인정함이 상당하다(대법원 1992. 7. 28. 선고 91다41897 판결 등 참조).
이 사건에 관하여 피고는 일본법에 의하여 설립된 일본 법인으로서 그 주된 사무소를 일본국 내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아래와 같은 사정을 앞서 본 법리에 비추어 보면 대한민국은 이 사건의 당사자 및 분쟁이 된 사안과 실질적 관련성이 있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대한민국은 이 사건에 대하여 재판관할권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① 이 사건 소송은 피고가 일본국과 함께 원고들을 불법으로 연행하여 강제노동을 시킨 일련의 행위가 불법행위에 해당함을 이유로 손해배상을 구하는 것인데, 대한민국은 위와 같은 일련의 불법행위 중 일부가 이루어진 불법행위지에 해당한다.
② 원고들은 대한민국의 민법에 근거하여 피고의 불법행위책임을 묻고 있다.
③ 원고들이 이 사건에서 주장하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일본 내의 물적 증거는 거의 멸실된 반면 피해자인 원고들은 모두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고, 사안의 내용이 대한민국의 역사 및 정치적․외교적 변동 상황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3. 본안에 관한 판단
가. 손해배상책임의 성립
1) 준거법의 결정
이 사건에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성립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법은 법정지인 대한민국에 있어서 외국적 요소가 있는 법률관계에 적용될 준거법의 결정에 관한 규범(이하 ‘저촉규범’이라 한다)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는데, 앞서 본 인정 사실에 따르면 피고의 불법행위와 그로 인한 손해의 발생 등의 법률관계는 구 섭외사법(1962. 1. 15. 법률 제996호로 제정된 것, 이하 같다)이 시행된 1962. 1.15. 이전에 발생하였다. 이처럼 1962. 1. 15. 이전에 발생한 법률관계에 적용되는 대한민국의 저촉규범은 1912. 3. 28.부터 일왕(日王)의 칙령 제21호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의용(依用)되어 오다가 군정법령 제21호를 거쳐 대한민국 제헌헌법 부칙 제100조에 의하여 현행법령으로서 대한민국 법질서에 편입된 일본의 법례(法例)(1898. 6. 21. 법률제10호)이다. 원고들의 청구권이 성립한 시점에 적용되는 위 법례에 의하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성립과 효력은 불법행위 발생지의 법률에 의하는데(제11조),이 사건 불법행위지는 대한민국과 일본에 걸쳐 있으므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판단할 준거법은 대한민국법 또는 일본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원고들은 대한민국법을 준거법으로 하여 피고의 불법행위책임을 묻고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으므로, 피고의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성립하는지 여부는 대한민국법을 준거법으로 하여 판단하기로 한다. 나아가 제정 민법이 시행된 1960. 1. 1.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 불법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의 판단에 적용될 대한민국법은 제정 민법 부칙 제2조 본문에 따라 구 민법(의용 민법)이 아닌 현행 민법이다.
2) 피고의 위자료 지급의무
앞서 본 인정 사실과 채용한 증거들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일본국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불법적인 침략전쟁의 수행과정에서 군수사업체 등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조직적으로 인력을 동원하였고,피고는 이러한 일본국 정부의 인력 동원 정책에 적극 편승하여 인력을 확충하였는바,당시 위의 침략전쟁들로 인하여 다수의 학생들까지 동원하고 있는 터라 근로정신대원으로 지원하더라도 여학교 또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도록 지원할 여유가 없는 상황임에도, 당시 일본국 정부와 피고는 원고들이 다니던 학교의 교장이나 담임교사 등 나이 어린 원고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연장자들을 동원하여, ‘근로정신대원에 지원하여 일본에 가면 상급학교에 진학시켜 주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취지의 거짓말로 근로정신대에 지원할 것을 회유하였고, 그에 속은 원고 최태영을 부모의 의사에 반하여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도록 하고, 원고 김옥순, 박순덕, 오경애, 이석우를 강제로 일본으로 동원하였으며, 원고들은 당시 한반도와 한국인들이 일본의 불법적이고 폭압적인 지배를 받고 있던 상황에서 장차 일본에서 처하게 될 노동의 내용이나 강도, 환경등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일본국 정부와 피고의 위와 같은 조직적인 기망으로 인하여 근로정신대에 지원하거나 강제로 동원되어 그 의사에 반하여 이 사건 공장에서 노동에 종사하게 되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또한 앞서 본 사실관계에 의하면, 원고들은 당시 만 12세 내지 15세의 나이 어린 여성들이었음에도 피고는 이러한 원고들을 기숙사에 집단으로 수용하면서 매일 장시간 동안 엄격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철을 깎거나 자르는 등의 힘들고 위험한 노동에 종사하게 하였고, 열악한 기숙사와 부실한 식사만을 제공하고, 급여조차 지급하지 아니하는 등, 원고들의 자유를 현저하게 억압한 채 생명이나 신체에 위협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환경에서 위험하고 혹독한 노동에 강제로 종사하게 하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피고의 원고들에 대한 행위는 당시 일본국 정부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고, 이러한 피고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들이 심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다.
따라서 피고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위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들이 입은 정신적 고통을 금전으로나마 배상할 의무가 있다.
나. 피고의 주장에 관한 판단
1) 청구권협정에 의한 원고들의 청구권 소멸 주장
가) 피고 주장의 요지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은 1965. 6. 22.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에 체결된 청구권협정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는데, 국가 사이의 일괄처리협정에 해당하는 청구권협정의 체결로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청구권은 이미 소멸하였다. 아울러 1961. 5. 10.자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을 비롯하여 수차례 한일회담에서 대한민국의 대표 또는 교섭담당자가 피징용자의 위자료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는 취지로 발언하거나 이를 전제로 교섭한 점, 1965. 7. 5. 대한민국 정부가 발행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조약 및 협정해설’에서 청구권협정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국민에 대한 각종 청구 등이 모두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멸된다고 명시한 점, 그 밖에도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어 더 이상 일본국이나 일본국 국민에 대한 추가청구가 인정될 수 없다는 취지가 청구권협정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이나 관계 장·차관의 발언이나 답변, 헌법소원 사건(95헌마161)에 제출된 재정경제원장관의 1995. 7. 19.자 의견서 등에서 확인되는 점 등에 비추어 보아도 원고들의 이 사건 청구는 인정될 수 없다.
나) 판단
위에서 채용한 증거에 의하여 인정되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을 종합하면, 원고들이 주장하는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으므로(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3다61381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였다는 피고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1) 원고들은 피고를 상대로 미지급 임금이나 보상금을 청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위자료를 청구하고 있다.
(2) 청구권협정의 체결 경과와 그 전후 사정에 의하면,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정치적 합의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3) 청구권협정 제1조에 따라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이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아니하다.
(4) 청구권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5) 대통령이나 관계 장·차관의 의견이 사법부의 판단을 구속할 수는 없으며, 국가가 조약을 체결하여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함에 그치지 않고 국가와는 별개의 법인격을 가진 국민 개인의 동의 없이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직접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근대법의 원리와 상충되고, 국가가 조약을 통하여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는 것이 국제법상 허용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와 국민 개인이 별개의 법적주체임을 고려하면 조약에 명확한 근거가 없는 한 조약 체결로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 이외에 국민의 개인청구권까지 소멸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인데, 청구권협정에 개인청구권의 소멸에 관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의사 합치가 있었다고 볼 만큼 충분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2) 소멸시효 완성 주장
가) 피고 주장의 요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이미 시효가 완성되어 소멸하였고, 원고들에게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존재하지도 않았으므로,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이 권리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 설령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원고들이 권리행사의 객관적 장애 사유가 해소된 날로부터 신의칙상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원고들의 청구는 배척되어야 한다.
나) 판단
(1) 앞서 본 바와 같이 원고들에 대한 피고의 불법행위 및 그로 인한 손해의 발생은 원고들이 최종적으로 귀국한 1945년 11월 무렵 이전에 발생하였다고 할 것이고,원고들의 이 사건 소는 1945년 11월 무렵 및 현행 민법 시행일인 1960. 1. 1.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인 2015. 4. 7. 제기되기는 하였다.
(2) 그러나 앞서 든 각 증거에 의하여 인정되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을 종합하면,원고들이 이 사건 소를 제기할 무렵까지도 원고들에게는 객관적으로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었거나 원고들이 그 장애 사유가 해소된 때로부터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하였다고 판단되므로, 피고의 위 주장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① 1965. 6. 22.까지는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국교가 단절되어 있었으므로,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대한민국에서 판결을 받더라도 이를 집행할 수 없었다.
② 1965년 한일 간 국교가 정상화되었으나, 한일 청구권협정 관련 문서가 모두 공개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청구권협정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 또는 일본국민에 대한 개인청구권이 포괄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견해가 대한민국 내에서 일반적이었다.
③ 일본에서는 청구권협정의 후속 조치로 재산권조치법을 제정하여 원고들의 청구권을 일본 국내적으로 소멸시키는 조치를 하였다.
④ 그런데 원고들과 같이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함에 따라 그 개인청구권,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서서히 부각되었다.
⑤ 앞서 본 바와 같이 민관공동위원회는 2005. 8. 26.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히기는 하였다.
그러나 민관공동위원회도 위와 같은 견해를 밝히면서 강제동원 내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 개개인의 일본 군수업체에 대한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범위에 포함되는지에 관하여는 구체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청구권협정을 통해 일본에서 무상으로 받은 3억 달러에 강제동원 피해자의 공탁금이 포함되어 있다는 등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민관공동위원회의 위 견해 표명만으로 원고들의 권리행사 장애 사유가 해소되었다고 볼 수 없다.
⑥ 대법원은 2012. 5. 24. 선고한 2009다22549 판결과 2009다68620 판결을 통해 청구권협정으로 원고들과 같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시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위 각 판결은 환송판결로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기업들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즉시 확정되지도 않았고, 원고들이 위 판결의 당사자도 아니었다. 원고들과 같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는지에 관하여 여전히 국내외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으로 과거 일본 정부 등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현재까지도 청구권협정 관련 정보 공개조차 거부하고 있다. 대법원이 2018. 10. 30.에 2013다61381 전원합의체 판결을 선고함으로써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법리가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정들을 종합하면, 대법원 2009다22549 판결과 2009다68620 판결이 선고됨으로써 원고들과 같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객관적으로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 사유가 해소되었다고 하더라도, 원고들과 같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경우 장애사유가 해소된 때로부터 권리행사에 필요한 상당한 기간은 시효정지에 준하는 기간보다 연장하여 3년으로 인정함이 옳다(대법원 2013. 5. 16. 선고 2012다202819 전원합의체 판결 등 참조). 원고들이 위 대법원 2009다22549 판결과 2009다68620 판결의 선고일인 2012. 5. 24.부터 3년 이내에 이 사건 소를 제기한 이상, 원고들로서는 그 장애사유가 해소된 때로부터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하였다고 봄이 옳다.
⑦ 이 사건 불법행위는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수행과정에 적극적으로 편승한 반인도적인 행위임에도, 피고는 무려 7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책임을 부정하고 회피하고 있다. 이러한 피고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여 원고들에 대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무의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소멸시효 제도의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의성실의 원칙에도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대법원 2011. 6. 30. 선고 2009다72599 판결 등 참조).
다. 손해배상책임의 범위 등
1) 위자료의 액수
피고는 과거 일본국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을 위한 강제적인 인력 동원 정책에 적극 동참하여 원고들을 기망하거나 강제로 연행하여 강제노동에 종사하게 강요하였고, 특히 원고들은 나이 어린 여성들임에도 가족과 헤어져 자유를 박탈당한 채 열악한 환경에서 위험하고 혹독한 노동에 강제로 종사해야 했다. 이러한 가해행위의 불법성의 정도와 피고의 가담 정도, 원고들의 연령 및 강제노동에 종사한 기간, 노동의 강도, 근로환경과 자유 억압의 정도, 임금 등이 제대로 지급되지 아니한 점 등 원고들이 입은 피해의 정도, 원고들이 귀국 후에 겪은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 불법행위 이후 상당한 기간 피해복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아니한 점과 불법 행위일부터 이 사건 변론종결일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우리나라의 물가와 국민소득수준 등이 크게 상승하였고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법행위일부터 장기간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그 기간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가산하지 아니하는 사정, 기타 이 사건 변론을 통하여 나타난 제반 사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피고가 원고들에게 지급하여야 할 위자료는 원고들에 대하여 각 100,000,000원으로 정함이 타당하다.1)
2) 지연손해금의 기산일
원고들은 피고의 위자료 지급채무에 대하여 이 사건 소장 부본 송달일 다음 날부터의 지연손해금을 청구하고 있다.
그런데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서는 사실심 변론종결 당시까지 발생한 일체의 사정이 그 참작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위자료 산정의 기준이 되는 국민소득 수준이나 통화가치 등도 변론종결시의 것을 반영해야만 하는바, 불법행위가 행하여진 시기와 가까운 무렵에 통화가치 등의 별다른 변동이 없는 상태에서 위자료 액수가 결정된 경우에는 그 채무가 성립한 불법행위시로부터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보더라도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으나, 불법행위시와 변론종결시 사이에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되어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 반드시 참작해야 할 변론종결시의 통화가치 등에 불법행위시와 비교하여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도 불법행위시로부터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보는 경우에는 현저한 과잉배상의 문제가 제기된다. 따라서 불법행위시와 변론종결시 사이에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되어,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 반드시 참작해야 할 변론종결시의 통화가치 등에 불법행위시와 비교하여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는, 예외적으로라도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 배상채무의 지연손해금은 그 위자료 산정의 기준시인
                            
1) 원고들이 당시 만 12~15세의 어린 나이였고, 피고와 일본국 정부의 회유와 거짓말에 속아 지원하거나 강제동원된 점과 당시의 노동환경이나 강도 등 피고 행위의 반인도적 성격 등을 고려하면, 형식적으로라도 본인의 지원을 받아 차출되었는지, 그렇지 않고 강제로 차출되었는지 여부에 따라 위자료 액수를 달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변론종결 당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아야만 한다(대법원 2011. 1. 13. 선고 2009다103950 판결 참조).
이러한 법리에 비추어 보면, 이 사건의 경우 불법행위 종료일인 1945년경 무렵부터 이 사건 제1심 변론종결일인 2016. 9. 21.까지 사이에 71년 이상의 장기간이 경과하고 통화가치 등에 상당한 변동이 생겼으며, 그와 같이 변동된 사정까지 참작하여 이 사건 변론종결시를 기준으로 위자료의 액수를 결정하였으므로, 이 사건 제1심 변론종결일 이후의 기간에 대해서만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원고들이 위 각 위자료 상당액에 대하여 이 사건 소장 부본 송달일 다음 날부터 이 사건 제1심 변론종결일 전날인 2016. 9. 20.까지의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구하는 부분은 받아들일 수 없다.
라. 소결론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100,000,000원 및 이에 대하여 제1심 변론종결일인 2016. 9.21.부터 제1심 판결선고일인 2016. 11. 23.까지는 민법이 정한 연 5%, 그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정한 연 15%의 각 비율로 계산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원고들은 이 사건 소장 부본 송달일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비율에 의한 지연손해금을 구하고 있다. 그러나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 제3조 제1항 본문의 법정이율에 관한 규정 부칙(2015. 9. 25. 제26553호)제2조 제2항에 의하면, 2015. 10. 1. 이후의 지연손해금에 적용될 법정이율은 소송촉진등에 관한 특례법 제3조 제1항 본문의 법정이율에 관한 규정이 정한 연 15%이므로,이를 초과하는 원고들의 지연손해금 청구는 이유 없다].
4. 결론
그렇다면 원고들의 이 사건 청구는 각 위 인정 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이를 인용하고 나머지 청구는 이유 없어 기각하여야 한다.
제1심 판결은 이와 결론이 같아 정당하므로, 피고의 항소를 모두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재판장 

판사 이원범 李源範
판사 김봉원 金鳳元
판사 강주헌 姜柱憲

첨부파일 20190130서울고등법원후지코시김옥순 판결.docx

http://cafe.daum.net/1945-815/jXhE/1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