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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소식(가나다라 순)/이명박 심판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일제는 살아있는 명성황후를 불태워 죽였다.

일제는 살아있는 명성황후를 불태워 죽였다.

일제는 살아있는 명성황후를 불태워 죽였다 (5부)

칼에 찔린 후 발가벗겨지고 능욕당하고 산 채로 불태워진 명성황후


편집부

기사입력 

2013/11/20 [10:37]

 

명성황후 시해 (영화 한반도) https://youtu.be/-LSqH7LvwyY @YouTube  


편집부

기사입력 

2013/11/20 [10:37]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들은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이 휘두른 칼에 맞아 죽었고 시신은 불태워졌다.”고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소설이나 영화/드라마/뮤지컬을 통하여 묘사된 명성황후의 최후만을 알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장면들은 모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드라마/뮤지컬의 장면은 너무도 처참하고 치욕스러웠던 명성황후의 최후를 적나나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대중매체의 제한성 때문이던가, 아니면 아예 제작자들이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해 모르고 표현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필자의 눈엔 후자로 보인다.  

▲ 뮤지컬 명성황후에서의 최후 장면     © 편집부

 
 
 
그동안 명성황후의 최후를 기록한 문서로는 당시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 보고서>와 일본인 행동대원이었던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의 수기 <민후조락사건(閔后殂落事件)> 정도였다. 이 두 문서에 명성황후의
최후가 언급되기는 했으나 그렇게 처참하고 치욕적이지는 않았다. 

<베베르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 있었던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티니의 증언이 주 내용이나, 사바티니는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직전 현장에서 빠져 나와 명성황후의 최후를 직접 목격하지 못해 나중에 현장에 있었던
한 무명상궁의 증언을 인용해 기록하고 있다. 여하튼 이 <베베르 보고서>는 일제의 만행을 전 서방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게된다. 

당시 러시아공사인 베베르(weber)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습격하고, 한 나라의 국모를 서슴없이 시해한 사상 유래 없는 만행이다.”
그렇다. 명성황후를 시해함은 세계인류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악무도한 만행이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들의 잘못을 아직까지 시인하지 않고 있는 일본은 야만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야만인인 것이다. 

<민후조락사건>이란 문서는 당시 일본인 행동대원인 고바야카와가 명성황후 시해의 배경과 계획수립과정부터
무죄판결과정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수기(手記) 형식의 문서이다. 그 내용을 검토해 보면 고바야카와는 결정적인
장면인 명성황후의 최후를 직접 목격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고바야카와는 왕비를 직접 죽이는 현장에는
없었던 인물이다.  

 
▲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의 최후 장면     ©편집부


우선 명성황후의 최후에 관한 다른 증언들을 언급해 보기로 한다.
* 왕세자 이척의 증언 : "일본인 흉한들은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
* 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 :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
(힐리어의 보고서는 왕세자의 증언과 거의 일치한다)

영국인 힐리어의 보고서에는 왕비가 실외(室外)에서 변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민후조락사건>에는 왕비가
죽어 있는 것을 실내(室內)에서 보았다고 기록했다. 이는 명성황후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고바야카와가 실내에
죽어있던 다른 궁녀를 왕비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몇 가지 증언에서 보다시피 명성황후의 죽음은 단순히 일본인의 칼에 찔려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명성황후 사후 70여년이 지나자 이상한 주장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895년 이후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던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해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구체적인 언급을 한 학자는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겐타로(山倍健太郞)였다.
그는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라는 책에서 "사체능욕(死體凌辱)"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는데,
이것이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야마베 겐타로도 뭔가 진실은 감추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즉 시해범들이
명성황후를 시간(屍姦)했다는 말이었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 명성황후 시신을 소각하고 있는 장면의 상상도. 과연 시신을 소각했을까!      © 편집부





그리고 22년이 지난 1988년 일본의 여류소설가 쓰노다 후사코여사의 소설인 <민비암살>에서 다시 능욕설이 제기되었다.

아래와 같이 간단히 언급만 하고 구체적인 행위는 생략하는 문구를 썼다. 차마 구체적인 행위를 일본인 여성으로서

언급하기가 무척 심적으로 괴로웠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한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

보고가 있다...(중략)...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글로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라고 쓰면서 뭔가(에이조 보고서)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 후 한.일 월드컵이 열린 2002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작가 김진명씨는 베일에 감쳐져 있었던

명성황후의 최후를 상세히 기록한 <에이조(英藏) 보고서>의 전문을 입수하게 되며, 이 보고서는

그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에도 언급된다. 이 <에이조 보고서>의 발견으로 그동안 베일에 감춰져 있었던

명성황후의 최후가 일반인에게 적나나하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당시 오마이뉴스를 통해 보도되었으나 다른 대형신문사나 방송에서는 별로 중요치 않은 듯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명성황후의 최후는 대대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못했다. 우리나라 주요언론사의 역사인식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

같아 보여 씁쓸한 느낌을 금할 길이 없다. 

<에이조 보고서>란 1895년 당시 일본국 법제국 소속으로

조선정부의 내부 고문이었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참사관이 본국 법제국 스에마쓰(末松)장관 앞으로 보낸

외교문서(보고서)로 ‘왕비(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상을 보고’한 서간문이다. 에이조는 당시 미우라공사와는 다른

외교적 라인에 서 있었던 인물이라 이 사건을 아주 객관적으로 잘 기록하고 있다.

 (‘에이조 보고서’ 전문은 제 7부에 게재합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명성황후 시해의 일본인 행동대원이었던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의 수기

<민후조락사건(閔后殂落事件)>과 당시 시해 현장에 있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참사관의 <에이조보고서>를

결합하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완벽한 줄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다.  

 


▲ 명성황후의 최후 장면을 기록한 '에이조 보고서' (일본외교문서)     © 편집부




너무도 치욕적인 명성황후의 최후  

보고서 중 가장 눈길을 끄는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해 기록한 문구는 아래와 같다. 

그 방법은 경솔하기 이를 데 없으므로 거의 애들 장난[兒戱]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데

다행히 그 가장 꺼림칙한 사항은 외국인은 물론 조선인에게도 서로 알려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其方法は輕率千万殆んど兒戱に類するなきやと思わるるも無之にあらず幸に其最も忌わしき事項は

外國人は勿論朝鮮人にも不相知候樣子に候)

첫째가 가장 꺼림칙한 사항인 시해장면을 외국인이나 조선인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위와 같이

기록한 문구이다.

그래서 이 문서가 나오기 전까지 일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해 정확한 진술을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글 중에 다행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뭔가 봐서는 안되는 짓(가장 꺼림직한 사항)을 했는데 들키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이 ‘가장 꺼림직한 사항’과연 뭘까!

 

 

 

▲ 1895년 '리옹프와이어'신문에 실린 삽화. 한 일본인이 명성황후의 음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특히 낭인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고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습니다.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 --可笑又可怒 / 웃을 일, 또한 노할 일-- 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 어렵습니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몹시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습니다.

(殊に?次馬連は深く內部に入입み王妃を引き出し二三個處刃傷を及し且つ裸?とし局部檢査(可笑又可怒)を爲し最後に

油を注ぎ燒失せる茅 誠に之を筆にするに忍びざるなり 其他宮內大臣は頗る慘酷なる方法を以て殺害したりと云う)                    

둘째가 바로 명성황후의 최후 장면인데, 아래 내용을 잘 음미해 보면 명성황후는 죽지 않은 상태(단지 칼로 상처만

입은 상태)에서 발가벗겨지고 능욕(국부검사)을 당했다. 강간(强姦) 또는 윤간(輪姦)까지 당했는지는 이 기록으로

확신할 수 없으나 그 개연성은 충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시간(屍姦)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왕비의 몸에 기름을 부어 불에 태워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 근거는 원문의

소실(燒失)이라는 단어로 ‘태워서 ( )을 잃게 하다.’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燒失(命)으로 괄호안의 목숨 명(命)이

생략된 것이 틀림없다. 칼로 상처를 입고 국부검사를 하는 중에 사람이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근거로는 이미 앞에서 국부검사 시 ‘웃을 일 또한 노할 일’이라고 언급해놓고, 다시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 어렵습니다.’라고 다시 언급한 점이다. 이미 죽어있는 시신을 단순하게 태우는 일이라면 이런 표현을 다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상식이다. 

이는 분명 뜨거운 석유 불에 태워지면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다 죽어가는 벌거벗은 여자(왕비)의 모습을

쳐다보다보니 인간으로 차마 글로 옮기기 어렵다는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불타기 전에 죽었다면

분명 시신을 불태웠다고 썼을 것이고, ‘차마 글로 옮기기 어렵다’는 표현을 시신을 불태우면서 기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분신 자살하는 사람. 명성황후의 벗겨진 몸에 석유를 뿌려 태워죽이는 장면과 아주 흡사하다.      © 편집부

 



또 다른 근거는 ‘궁내부대신을 살해했다’고 분명 언급한 기록이다. 궁내부대신을 죽였다고 분명 기록했는데

왕비를 죽였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명성황후는 석유 불에 태워지면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야마베 겐타로도 차마 같은 일본인으로서 살아있는 왕비를 불태웠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 얼마나 뜨거우셨을까!!! 삼가 명성황후마마의 명복을 빕니다.

이렇게 왕비를 지키지 못한 조선정부의 무능도 문제지만,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일본에게 아무런 이의제기도 못하게

만든 1965년 한일협정 당시의 위정자들과 아직까지도 일제의 주구가 되어 식민지배의 향수를 느끼고 있는 친일파들이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에 대거 포진되어 있다는 것이 국가의 큰 불행인 것이다. 

필자가 비록 치욕의 역사이지만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나라가 힘이 없으면 외적들에 의해

국모라도 이렇게 처참하고 치욕적으로 죽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그런 나라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친일 집단인 뉴라이트는 “명성황후 잘 죽었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아래와 같다.

이래 가지고서야 나라가 제대로 되겠는가 말이다.

돌아가신 우국열사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이 지하에서 통곡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