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독립정신 답사단으로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독립정신 답사단으로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독립정신 답사단으로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글 : 조원록 (한류문화교류단 케이랑 회원)


우연히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를 방문하는 답사단에 끼었다. 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아 대규모 답사단이 일본 내부로 들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사실 난 이전까지 "독도는 우리 땅"이라든가 스포츠 경기에서 "한일전"은 반드시 이겨야한다는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내겐 너무 버거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누군가가 언제든지 바로 나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답사단의 일정은 2013년 7월 19일(금)부터 7월 23일(화)까지 4박 5일 간 도쿄, 도야마, 가나자와, 교토, 오사카 등을 다니며 이봉창의사 투탄의거지, 2·8독립선언기념관, 2·8독립만세운동지(히비야공원), 야스쿠니신사, 이치가야형무소, 간토대지진 위령비 및 자료관, 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 및 암장지적비, 미쓰비시 군수공장 강제노역현장, 오사카대공습 교바시역폭격 피해자위령비, 윤봉길의사 수형지 등을 도는 것이다.



답사단 대원들이 2ㆍ8독립선언 중 체포된 조선인유학생들 이 옥고를 치르고, 이봉창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이치가야형무소 형사자위령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답사 도중 저녁에 토론을 하면서 사학과 대학생이 말했다.


"만약 당시 조선이 일본보다 강했더라면 조선이 먼저 일본을 쳐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여러 의견을 얘기했지만 난 이 학생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일제의 대외 팽창 정책에 따라 제국주의 침략 이데올로기를 확장하는 총본산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 곳을 방문했을 때 첫 느낌은 '그냥 동네에 예쁜 공원이 있구나'정도였다. 마치 우리나라 신사동에 도산공원을 방문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안 쪽으로 더 들어가 보니 '유슈칸'(遊就館)이라는 전쟁박물관 옆에 '대동아성전대비'(大東亞聖戰大碑)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난 한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일본이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 성스러운 것이다?!'


그 순간 야스쿠니신사에 놀러온 일본인들이 다른 색채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 저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을 자신들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동원해 희생시켜놓고 그것이 성스러운 전쟁이었다라고 진정 생각한단 말인가. 본인들은 우월한 민족이라서 열등한 민족 개화시켜 주려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만약 지각(知覺)이 있는 국민이라면 저런 현수막이 걸려 있는데 가만히 둘 수 있단 말인가.


언젠가 일본 학자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서 미개했던 조선인이 개화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떠오른다.


야스쿠니신사 지역 안을 돌면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분명 사람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신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사진을 찍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난 함께 동행 했던 리츠메이칸대학 코리아연구센터 배영미 박사에게 질문을 한다.


"저 사람들은 야스쿠니신사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아니오. 태반이 역사적인 의미를 모르고 찾아오는 사람들이에요. 그냥 동네에 예쁜 신사가 있으니까 놀러 오는 거죠. 여기서 결혼식도 올리는 걸요"


난 한 동안 답사단에 끼지 못하고 멍하니 야스쿠니신사 전경을 바라본다. 분명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게 사실인데 지금 이곳은 너무나 평화롭다. 그렇다면 야스쿠니신사에서 저들이 죄책감 때문에 미안한 모습이 보이도록 행동해야 된다는 말인가.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한 낮의 평화로운 광경을 바라볼 뿐이다.


야스쿠니신사 전경.


정리되지 않은 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답사단의 빡빡한 일정은 계속 진행됐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전도연 씨가 나왔던 영화 “밀양”이 떠올랐다.


서른세 살에 남편을 잃은 그녀는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향한다. 이미 많은 것을 잃어버린 그녀인데 아들마저 유괴당한 후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그녀는 마치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란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아들마저 잃은 그녀가 우울증에 시달리며 피폐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못한 동네 주민들은 그녀에게 교회에 나가볼 것을 권유한다. 그런 동네 주민에게 그녀는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남의 사랑이 크시다면요. 그렇다면 왜 우리 준이가 그렇게 처참하게 죽게 내버려두셨어요? 그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구?”


시간이 흐른 후 사람들은 그녀에게 살인자가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 용서하라고 얘기한다. 결국 그녀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아서 드디어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게 됐다면서 살인자가 구속된 교도소로 면회를 간다. 이제는 살인자를 직접 만나서 용서를 해주고 싶다고.


살인자는 말한다.


“하느님께서 이미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라고 나서부터 마음이 편안 해졌습니다”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살인자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용서의 마음으로 평온해져 있던 그녀의 가슴은 다시 증오로 불타오른다.


<영화 밀양의 한 장면 >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근데 내가 어떻게 다시 그 사람을 용서하냐고요!!”


“내가 그 인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느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 받았어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4박 5일 간의 빡빡한 일정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난 “용서와 화해”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용서’란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지옥 속에 가둬두는 것이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고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용서’를 한다. 그런데 진정으로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해서는 ‘화해’가 필요하다. 진심어린 반성과 사과를 통해서 교감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화해’가 이루어진다. 반성과 사과를 통해서 한 맺혀 응어리져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모두에 얘기한 것을 다시 하자면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내겐 너무 버거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누군가가 언제든지 바로 나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벌어진 일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바라보는 가이다. 극단적으로 내가 당시 일본인처럼 행동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미 벌어진 일을 바라보는 태도에 달려 있다. 진정성을 가지고 ‘용서’를 넘어선 ‘화해’를 하고자 한다면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그들은 아직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은가.


출처 : 한류문화교류단 케이랑 매거진 창간준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