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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좀 합시다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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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굴절된 역사 이희빈 2006-05-10 1640
5 현대판 고려장(高麗葬) 이희빈 2006-05-09 2507
4 신종 유행어 이희빈 2006-05-09 1807
3 신용불량자가 되는 지름길이 되다니 이희빈 2006-05-09 1934
2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는 삶 이희빈 2006-05-09 1347
1 [Re]어머니의 숙제(2) 이희빈 2006-05-09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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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자 아버지의 명단을 보고 통...

 

 

 

 

이희빈

2007-11-09 29
96 미디어 다음 아고라 청원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인... 이희빈 2007-11-05 16
95 구속시킨대요 이희빈 2007-10-18 71
94 국민 고충 처리 위원회는 설립취지 이희빈 2007-10-18 55
93 남북 정상회담장에 바란다 이희빈 2007-10-03 18
92 신정아 누드사진보다 더 큰 사건은 왜 조용할까? 이희빈 2007-09-16 113
91 시력이 좋지 않아서 이런 글은 안보인답니다 이희빈 2007-08-28 101
90 우토로는 가라후토라고 불리우던 곳 사할린 땅 이희빈 2007-08-23 64
89 글쓰기도 않되는 국회 토론방에서 무슨 토론을 합니까... 이희빈 2007-08-11 52
88 백만 명이 넘게 피랍을 당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왜 조... 이희빈 2007-08-01 156

위의 내용에서 보듯이

처음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설립및 취지에

국민 모두는 정말 그 쓰라리고 원통한 일들이

모두 말끔하게 청산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아와서 관심을 보이고

그 어떤 일들이 그렇게 억울함을 당했을까? 하는 생각에

그 억울하고 원통한 사건들이 아직도 해결이 되지 못한 상황이라 조금이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싶은 마음에 국민들께서 여러분들이 다녀가셨습니다!

한국 전쟁 6. 25가 끝난 후 집이며 삶의 터전마저 폐허가 된 자리에는
불발탄과 탄피만 널려있던 그때.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인간의 처절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어난 사내아이가 있었으나 산모는 아이를 낳았는지?
어떻게 키우는지도 모르는 채 전쟁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터였습니다!

그래도
그 핏덩이를 받아서 키워주신 분이 계셨는데
그 분도 또한 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되어 딸이며 남편이며
사랑하던 가족을 생사조차 모르는 채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
아버지를 만나 살게 되었으나
아이를 낳을 수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지요!

그래도
그 어린 아기(본인)가 너무나도 불쌍한 터라 키우기 시작했지만
생모는 아이가 울어도 젖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지내던
어느 추운 겨울 날
아이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가
그만 미끄러운 얼음판에서 뒤로 넘어지고 말았지요!


그 바람에 허리 척추뼈가 탈골이 되었지만
집안은 가난하고 병원도 없던 시절.
그대로 자랄 수밖에 없었지요!

뿐만 아니라
여름이 되면 아기를 연못 속에 집어넣고
죽을 것같이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보고서도
시원하고 좋아서 그렇게 허우적거리는 줄 알고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를 하셨던 생모의 얼굴도 모르는 채
자라던 어느 날.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 학교)를 입학하여
첫 등교하는 날. 아이들의 놀림이 시작되었지요.

그도 그럴 것이 걸음을 걷는 모습이
마치 연체동물이 이동하고 있는 것같이 걸어가니
이웃에 사는 선배 누님이 길옆에서 나뭇가지를 꺾어서
신작로 바닥에다 금을 그으며 그대로 따라오라고 하였지요.

그렇게 시키는 대로 따라 걸었지만
자신은 똑바로 걷는 것 같아도 남들이 볼 때에는
걸음걸이가 엉망이었으니 허구한 날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어디를 가도 늘 놀림과 따돌림을 당하고
체육시간이 되어도 운동장에 나가 같이 뛸 수없는 몸으로
교실을 지켜야 했지요!

그렇게 날마다 울음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공부는 잘 하였으므로 우등상장을 타곤 했지만
그 것 마저 시기와 질투심에 구박을 받아야 했지요!

아버지께서는
일제 강제 징용을 지금의 사할린 땅 (가라후토 : 화태라고 하는 곳)으로
끌려가셔서 그곳에서 날마다 모진 강제 노동에 시달린 탓에
해소라는 병으로 고생을 하시던 터라 농사일도 제대로 못하시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사흘 전까지 나뭇지게를 지셔야 했지요!

초등학교 4학년인가 기억조차 희미한
구정이 지난 지 몇 일 되던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추녀 밑에서 낙성을 하시더니
그 길로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지요!

집안에서 유일하게 땔감을 조달하시던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누가 나무를 할 사람이 없었지요!

시골의 첩첩 산골이지만 산에 나무는 그리 많지 않았지요.

본인의 나이 열한 살 무렵.
몸에 맞지도 않는 지게를 지고 낫을 갖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하는데
낫질도 서툴고 걸핏하면 손가락을 낫에 베어 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부지기 수였지요!

그해 늦가을의 어느 날.
할머니께서 중풍으로 대소변을 받아내기 시작한지
3 년 만에 돌아가시고 나니 상청이 둘이 되었지요!

사람이 산다는 것.
얼마나 처절한지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일찍 철이 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다섯 식구가 살다가 3 식구가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공부를 열심히 하였지만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게 되자
산에 가서 나무를 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판단을 하셨는지

할아버지의 소상 차례를 지내는 날.
할머니 상청과 함께 다 내모실 것을 주장하시면서
만약 아버지 자신이 돌아가시게 되면 상청이 삼 상청이 되는데
어린 것 몸도 성치 않은 아이를 데리고 여자가 어떻게 삼 상청을 받드느냐?

하시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상청을 내모셨지요!
그런 일이 있은 지 두 달도 채 안되어서
결국 아버지께서도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이제 남은 식구라고는 단 두 식구 어머니와 본인밖에 없었지요!

그 동안 빚은 질대로 지고 집안은 가난에 허덕이며
앞길이 막막한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본인을
어머니께서 서당엘 다니라고 하시기에
서당엘 두 달 아흐레를 다니다가 당시의 문교부에서
앞으로는 영어를 많이 쓰고 한자는 차츰 없앨 계획이라고 하는
뉴스를 듣고 어떻게 하면 영어공부를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어느 날.
주한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들이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상대로 해서 강의록을 갖고
중학교 과정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엘 찾아갔지요!

왕복 16Km나 되는 곳에 있는 그곳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낮에는 나무를 하고 야간 4시간 수업을 받기 위해
검정 고무신에 다 떨어진 양말을 신고
강의록 한권과 공책 한 권 그리고 몽당 연필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걷다가 뛰다가 허기진 배와 땀에 젖은 옷에서는 냄새가 나고
그야말로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던 어느 날.
장마가 지는 것도 모르고 물이 늘어난 개울을 건너다가
떠내려 갈 뻔 했던 기억도........

추운 겨울.
눈이 밤새도록 내리던 어느 날.
눈 속을 헤매다가 새벽녘에 집을 찾아 들어온 적도 있었지요.



결국 고향을 떠나
어머니와 객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착하고 진실한 어머니를 도아주시는 분들이 계셨기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지요.

그러나 고향을 떠나 객지에 나왔어도
몸이 성치 않은지라 본인은 역시 가는 곳마다
또래 아이들과 혹은 후배들과 선배들 혹은 어른들까지
때리고 놀리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참고 또 참을 수밖에 없었지요!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사고서 이사를 오기까지
6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서울이며 시골이며 이곳저곳을
떠돌이 생활로 무려 13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습니다!

그렇게 몸이 건강하지 못한데도
당시의 의료장비는 본인의 척추장애를 찾아내지 못하고
결국 병역 의무를 다해야 했습니다.

민방위 예비군 훈련에서부터 방위병 생활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던 어느 날.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서울의 한 아동도서 외판원으로
일을 하던 어느 날.

생모가 돌아가셨다는 그것도 군 작전 탱크에 치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얼굴조차 기억에 없는
그 정신이상의 생모의 모습을 한 번도 뵙지 못한 채
그렇게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선산이 있으니 선산에 모시고 싶었지만
친 외가 측에서 극구 반대를 하며
본인을 키워 주신 어머니께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렇게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화장장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신 그 생모의 애처로운 사연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날마다 흐르는 눈물을 뒤로 한 채 본인 자신의 미래도
또한 중요했기에 결혼을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혼전에 이미 임신 중에 있었기에
처가 쪽에서도 서둘러 결혼을 요구했던 것이지요!

결혼 후 약 2개월 정도 흐른 어느 날.

아내는 임신중독이라는 병으로 고통을 호소했고
결국 결혼한 지 16개월 만에
아이도 아내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인생을 같이 포기할 수는 없었고
노모님께서 본인을 키우시느라고 온갖 고생을 하셨다는 생각을 하며
그래도 참고 또 참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 4년 정도 흐른 어느 날.
주한미군부대의 경비원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아내의 병 때문에 빚을 진 것을 다 갚고
젊은 남자가 홀로 살아갈 수는 없었기에
어데서 착한 여성을 만나게 되길 기대하면서
한 푼 두 푼 저축을 하였지요!

본인의 나이도
어느 덧 30이 넘어가고 있었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직장암 진단을 받으시고
서울대학병원에서 대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과응보라고 할까?
본인을 그렇게 핏덩이를 받아 키워주신
그 어머님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본인의 재혼보다 어머니를 먼저 구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마누라는 또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한 번 가시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에
어머님께 정성을 다해 치료에 전념을 하였지요!

의술이 좋아서일까?
본인의 정성이 하나님의 감화를 받아서일까?
어머니께서는 거의 완치를 보셨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무려7주간이나 받으시느라
날마다 병원이며 약이며 정성을 다한다고
여기저기에서 표창장이다 상장이다 주길래 받았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힘이 들었습니다!

결혼도 하고 싶었지만 세상을 먼저 떠난 아내의 모습이
자꾸 본인의 가슴을 짓눌렀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움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상처(喪妻)를 당한 홀아비라고 하는 인생명함이
서글픔만 더해 갈 무렵.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연령 차이가 10여년이나 넘게 차이가 났지만
그 사람 역시 아픈 과거가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서로의 아픔을 달래가면서
서로를 격려 위로하면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그냥 살았습니다!
예쁘고 귀여운 그 여자는 딸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남매를 낳고 살아가던 어느 날.
결국 어려서 다친 본인의 그 허리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고장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하반신이 마비가 된다고 하므로
수술을 받으라고 하더군요!

결국 수술 후에 본인은 장애인으로 정식 등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장애를 안고 살아가면서
그나마 다니던 직장마저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아들을 또 낳았습니다.
그 막내둥이의 재롱이 너무나도 즐거우셨는지?
어머니께서는 수술을 받으시고 옆구리로 변을 받아내기 시작한 지
21년 만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남북 통일이 되기를 그렇게 기다리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통일은 오지 않고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2000년도에 해놓았는데
생사조차 알려주지 않은채 그렇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이렇다 할 소식이 없습니다!

본인이 철길 건널목 안내원 일을 하는 중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종도 지켜드리지 못한 채
그렇게 남북통일을 기다리시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를 떠올리면 지금도 눈시울이 젖어옵니다!

그동안 누적된 생계형 부채로 인해
너무나도 어렵게 살아가고 있으며
집마저 근저당권 설정에 들어가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막내동의 재롱에 한시름 잊어보려고 하였지만
카드 빚 독촉에 못 이겨 법원에서 가압류를 들어오겠다고
법원에서 통지가 오고 있습니다!

마을에서는 노모님께 효성을 다했으니
노인회 총무를 좀 봐달라고 하는 통에
한 일 년 정도 일을 봐드리다가 본인의 척추가 자꾸만 아파서
도저히 할 수 없어서 사양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아픈 허리를 고통스럽게 참으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결혼식에 갔다오다가 그만 교차로상에서 신호 대기중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였습니다. 그나마 다니던 청원 건널목 안내원 일마져
권고사직을 당하고 일을 할 수 없고 병원엘 날마다 다니며 통원치료를 하고 잇습니다!
손해보험회사에서는 그 전에 병력을 들어 보상도 제대로 해주려 하지 않습니다!

돈을 못벌고 잇는 남편 보기 싫다고 아내마져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 심정은 오죽해서 집을 나갔겟습니까?
그 심정 이해하지요!

그리고 난 후

법원에 재판을 받으러 갔다 오다가 또다시 교통사고를 당하여

그나마 의지하고 타고 다니던 고물 자동차마져 폐차를 시키고

병원에 통원치료중에 있습니다만 이제는 정말 죽기 일보 직전입니다!
위에 열거한 일들이 하나하나 순조롭게 풀리게 된다면
이 가정도 원만하게 돌아갈 것 같습니다!
경찰서에 가출인 신고를 하였지만 제대로 찾아줄지가 의문입니다!

현재 고등학교엘 다니고 있는 딸아이와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들과
그리고 이제 초등학교 1 학년에 다니고 있는 막내둥이와
다섯 식구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룬 가정인데.....
어떻게 얻은 가족인데......
좀 도와 주십시오!

그동안 얼마나 쓰라린 고통을 당하며
죽을 고비를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인생인데.....
여기서 포기할 순 없지 않을까요?

이런 다짐을 하면서
내일은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잠을 청해봅니다!

http://blog.daum.net/hblee9362/7986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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